러셀을 배웅한 뒤 오토마츠는 기고나구에서 보내온 물건을 들고 역사로 돌아왔다.
짐짓 모르는 척 농담 같은 대꾸를 했지만 그게 무엇을 위한 선물인지 오토마츠는 잘 알고 있었다. 기관구의 동료들이 유키코가 죽은 날을 기억해 준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타블렛 륜이라도 건네듯 아무렇지도 않게 공양물을 건네주었고, 오토마츠 또한 그들의 호의를 말없이 받았다.
오토마츠는 나무로 짜넣은 개찰구에 서서 눈 쌓인 역장모를 벗고, 기차 바퀴 소리가 멀어져 가는 눈 속 어둠에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이런 큼직한 과일 바구니는 혼자 다 먹을 수도 없을 것이고, 소녀를 절에 데려다주는 길에 그대로 공양으로 올려야겠다고 오토마츠는 생각했다.
"자, 그만 가볼까? 데고이치 플레이트 챙겨 오너라. 그렇지, 인형도 잊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김이 보얗게 서린 사무실 문을 연 순간, 오토마츠는 흠칫 발을 멈추었다.
"여, 여보......."
아니, 아니었다. 그러나 솜 두른 빨간 겉저고리를 걸치고 마루방에 단정히 앉은 소녀의 뒷모습이 한순간 죽은 아내의 등으로 보였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어서 올라오세요, 진지 드셔야죠."
"아, 아니 이렇게 근사한 밥상을 네가 차려놓았니?"
"제 맘대로 부엌이랑 냉장고를 뒤졌어요, 죄송해요."
"무슨 그런 소릴. 내가 나갔다 온 사이에 이걸 죄 만들었단 말이냐?"
작은 밥상 위에는 두 사람분의 국과 달걀찜, 나물 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이거 제가 써도 되지요?"
막 지은 밥을 퍼담으며 소녀는 빙긋 웃음을 머금고 밥공기와 젓가락을 들어 보였다.
"죽은 집사람 것인데, 너만 괜찮다면 써도 좋고말고. 야, 아저씨 정말 깜짝 놀랐다. 너 요리를 아주 잘하는구나."
"전기밥솥은 시간이 걸려서 그냥 솥에 했어요. 제대로 불리지 못해서 꼬들밥이 됐을지도 몰라요."
"하아, 그냥 굴러다니던 재료로 이렇게 훌륭하게 상을 차리다니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어째 마법에 걸린 것처럼 기분이 붕 뜨는구나. 아저씨, 그럼 사양할 것 없이 다 먹어볼란다."
"전 철도일 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꿈이거든요. 그러자면 이렇게 후다닥 밥상 차려내는 법을 배워둬야겠죠?"
"하하, 그래? 그렇담 합격이다, 합격.
된장국을 한 입 떠 넣는 순간 오토마츠는 놀랐다기보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락 없이 죽은 아내가 끓여내던 된장국 맛이었다.
"맛있죠?"
"응? 으음..... 아저씨, 어째 가슴이 그들먹해지는구나."
"왜요?"
유키코가 살아 있다면 제 어머니에게서 배운 솜씨로 이렇게 된장국을 끓여주었으리라, 마지막 기차 편을 배웅한 뒤에는 항상 이런 저녁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오토마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토마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단정히 앉았다.
"아저씨, 지금 참 행복하다. 나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다가 그 바람에 어린것도 아내도 죽게 했는데, 그런데도 모두가 나한테 참 잘 대해주니 말이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정말루요?"
"암, 정말이고 말고. 이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전화가 울렸다. 오토마츠는 실내화를 발에 꿰고 사무실로 내려섰다.
"여보세요. 아아, 엔묘지 화상이신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우. 손녀딸을 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소. 어찌나 영리하고 참한 아가씨인지. 지금 댁의 손녀딸이 밥까지 차려줘서 먹던 참이오."
그러나 엔묘지 주지의 전화는 귀가가 늦은 손녀딸이 걱정되어 걸려온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요령부득의 말이 오고 간 끝에 화상은 올해 공양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오토마츠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 어깨를 떨군 채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주지의 말소리가 귓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오토마츠, 자네 어떻게 된 거 아냐? 우리 집엔 요시에고 누구고 자식들이라곤 코빼기도 안 비쳤어."
오토마츠는 책상 위의 셀룰로이드 인형을 손에 들고 레이스가 누르스름해진 드레스를 손끝으로 가만가만 건드려보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매표구 유리창에 고개 숙인 소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너 어째서 거짓말을 했니?"
얼어붙은 창에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눈발이 흩어졌다.
"무서워하실까 봐서......, 죄송해요."
"내가 왜 무서워하겠니. 세상 어디에 제 딸을 무서워하는 아비가 있겠니?"
"죄송해요, 아버지."
오토마츠는 천장을 올려다보아도 막을 수 없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유키코...... 어제저녁부터 차례차례 자라 가는 모습을 이 아비에게 보여준 게로구나. 저녁 참에는 책가방을 메고 아비 눈앞에서 차렷 해 보였지. 그리고 한밤중에는 좀 더 자란 모습을, 그리고 이번에는 비요로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십칠 년간 성큼성큼 자라는 모습을 아비에게 보여준 게로구나......"
소녀의 목소리는 내려 쌓이는 눈발처럼 조용했다.
"왜냐면요, 아버지는 변변히 기쁜 일 한번 없으셨잖아요, 저까지 자식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죽어버렸구요, 그래서......"
오토마츠는 셀룰로이드 큐피 인형을 가슴에 품었다.
"이제 생각나는구나. 이 인형, 네 어미가 울면서 네 관에 넣어주었던 것이지."
"예, 제일 소중한 친구였어요. 아버지가 비요로에서 사다 주셨지요? 어머니는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만들어주셨구요."
"그까짓 게 뭐 대단하다고..... 아버지는 네가 죽었을 때도 플랫폼의 눈말 쓸어내고 있었단다. 이 책상에서 그냥 여객일지만 쓰고 있었어. 오늘 아무 이상 없다고......"
"그야, 아버지는 철도원이시니까요. 아버지 직업이잖아요 그런 거,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토마츠는 의자를 돌려 돌아보았다. 유키코는 솜 두른 빨간 겉옷의 어깨를 움찔하며 서글프게 웃었다.
"유키코, 그래 잘 왔다. 어서 밥 먹자. 밥 먹고 목욕하고, 오늘은 이 아버지랑 함께 자자. 유키코, 정말 잘 왔다."
오토마츠는 그날의 여객일지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윽고 한밤중에 눈이 멈추었다. 호로마이 앞산에 은빛 보름달이 떠올랐다.
"히야, 호로마이 선이 이렇게 붐비는 거 처음 봤네. 완전히 만원이에요, 만원."
젊은 기관사는 차장 가방을 들고 홈을 걸으며 기하 12의 객차칸을 넘어다보았다.
"그야 물론이지. 사십오 년을 근속한 호로마이 역장님이 돌아셨어. 겉만 번드레 잘난 사람들 장례식하고는 다르지."
"그건 그렇지요. 오토마츠 씨, 아니, 호로마이 역장님, 진짜 좋은 얼굴이셨어요. 저도 훗날 꼭 그렇게 가고 싶을 정도예요. 저기, 홈 끝의 눈더미에 손깃발을 꼭 쥐고 쓰러져 계시더라구요. 입에 호루라기까지 무신 채로요."
"됐어.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게."
센지는 운전대에 오르기 전에 홈 끝에 서서 눈을 꼭꼭 밟았다.
ㅇ토마츠가 이곳에 쓰러진 채 발견된 것은 쓸쓸한 정월 초하루를 함께 지내고 돌아간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첫차로 찾아갔던 러셀이 앞으로 엎드리듯 쓰러져 있는 시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자네, 분명 그날 밤에도 이 차 탔었댔지?
"예. 기관구의 미치오하고 러셀로요."
"오토마츠 씨, 뭔가 평소와 다른 기색 없던가?"
"아뇨. 아주 정정해 보이였는걸요. 그러니 건강진단을 때맞춰 잘 받아두셔야 하는데. 아참, 그러고 보니....."
"뭐야?"
"이제 생각이 나네요. 제가 미치오하고 역 변소에 들렀었어요. 변소에 갔다가 애인한테 전화 좀 할까 하고 사무실을 잠깐 들여다봤거든요? 그랬더니 안에 밥상이 한 상 잘 차려져 있더라구요. 그것도 두 사람분이요."
"두 사람분?"
"그렇지, 이제 생각하니 그때 어째 소름이 오싹 끼치더라구요. 역장님이 누구랑 둘이서 나란히 밥 먹을 일이 있을 리 없잖아요?"
"뭐가 있을 리가 없어? 손님이야 제법 많았지."
"아니, 그게 아녜요. 아주머니 살아 계실 때 제가 밥을 한두 번 얻어먹었나요. 그런데 그날 밥상에 놓인 게 바로 옛날에 보던 아주머니 밥공기더라구요. 그리고 아주머니의 빨간 겉저고리가 방석 위에 놓여 있었어요. 얼핏 봤지만, 소름이 오싹 돋았었지요."
"그러려니 하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자주 놀러 오곤 했던 모양이야."
"사신이 왔었던 것 아닐까요? 역장님 맞으러요."
"바보 같은 소리, 귀여운 아이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진이 세상에 어디 있어? 오토마츠, 정신이 좀 흐릿해졌던 게지. 마누라는 죽었지, 폐선 당하지, 저년 퇴직이라지, 그러면 누구라도 정신이 멍해지지 않겠냐?"
"흠. 그러고 보니 아까 엔묘지 주지도 그런 말씀하시던데요. 역장님이 요즘 좀 이상했었다구요."
센지는 사방을 감싸 안으려는 듯 둘러싼 호로마이 산을 건너다보았다. 눈 걷힌 하늘은 그림물감으로 공들여 칠한 듯한 푸른색으로, 국철의 붉은색 기하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 철도원 中
신주쿠에는 줄곧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황혼 무렵, 가부키 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길에 이르렀을 때, 아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 어제 일 생각하는 거죠?"
교이치는 대답하지 않고 오가는 우산의 물결만 바라보았다.
"그건 착각이었어요. 그런 걸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면 머리가 이상해진다구요. 치매는 마흔부터 시작된다잖아요."
교이치도 물론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환영이니 유령, 타임 슬립 같은 것도 믿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어쩐지 믿고 싶었다.
자신이 마지막 버스를 타고 당숙네 집으로 간 뒤에, 아버지가 그 여자와 헤어지고 츠노하즈로 자기를 찾으러 왔었다고, 그리고 그 밤 깊은 길거리를 헤매며, 지나가는 사람이며 부랑자며 가게 문을 닫는 점원들을 붙잡고 이 근처에서 여덟 살 정도 되는 사내애를 못 봤느냐고 물으며 돌아다녔다고.
찾다가 그만 지쳐 다시 그 여자에게 가버렸다고 해도 좋았다. 어린 자식을 버릴 마음에 변함은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다만, 확실하게 이별의 말을 전하기 위해 아버지가 자기를 찾아 다시 이곳에 왔었다고 믿고 싶었다.
아버지 나름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만 해도 그저 자기 것일 뿐일 괴로움을 어쩌지 못해 아이를 지워버렸으니 이제 새삼스럽게 아버지를 책망할 수도, 책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자라면, 둘러대지 말고 똑 부러지게 잘라 말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택시는 네온 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는 가부키 거리를 달렸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바라보며 교이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다.
아무래도 만나고 싶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유형지 같은 타국에서 보내게 될 앞으로의 삶과, 애꿎게도 자신과 함께 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아내를 위해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모두 풀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자동차는 아무 일도 없이 츠노하즈의 북적대는 풍경을 지나치고 말았다.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몸을 묻으려는 순간, 교이치는 건너 편 신사의 어두운 참례길 안쪽으로 얼핏 하얀 여름 양복이 지나쳐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미안하지만 잠깐 세워요!"
자동차는 신호 바로 앞에서 급정지했다.
"왜 그래요?"
"아니, 별일 아냐. 절에 들러 부적 하나 사가려고.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이번에도 그저 착각인지 몰랐다. 안개비에 가려 길 저 앞까지 시야가 흐릿했다.
참례길 양쪽에서 은행나무와 벚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뻗쳐 하늘을 덮고 있었다. 입구 기둥 밑을 지나기 전에 교이치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양복 앞단추를 채웠다.
"아버지......?"
터널처럼 어두운 돌담, 가로등 불빛이 만든 둥그런 원 안에 아버지는 멍하니 서 있었다. 하얀 파나마모자에 마 여름 양복. 헤어지던 그날 그 차림 그대로였다.
"아, 교이치! 얼마나 찾아다녔는 줄 아니? 이런 곳에 있었구나!"
안경에 야스쿠니 거리의 불빛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 나 데리러 온 거지?"
아버지는 대답을 주저하며 천천히 교이치에게 다가왔다. 그리운 포마드 냄새가 먼저 코끝에 와닿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아버지...... 나가시마가 진짜 자이언츠 팀에 입단했어."
"흐음, 그래? 너하고 야구 한번 같이 못 해줬구나."
"그런 건 괜찮아. 맨날 다모오랑 같이 하는데, 뭐. 아저씨가 유니폼도 사주셨어. 내 등번호는 4번이야."
아버지는 교이치의 말을 듣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던 아버지는 마음을 정한 듯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한테 할 말이 있다만, 들어주겠지?"
"응, 말해. 나, 절대로 울거나 화내거나 그러지 않을 거니까. 아버지 생각하는 거 다 말해."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서,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교이치와 거의 비슷했다.
"아버지는 지금 아주 어려워."
"응, 알고 있어."
"네 어머니 죽고 회사는 넘어가고 이제는 더 이상 도쿄에 있을 수도 없게 되었어. 어디 먼 데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린 너를 데리고 갈 수도 없어. 게다가...... 그 누나도 너하고 함께 가는 건 싫다고 하고."
아버지는 자식과 여자를 양쪽에 올려놓고 저울질을 했을까. 아니,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자식의 행복을 위해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표정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지만 교이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참으로 선했다.
아버지는 간단하게 잘라 말했다.
"교이치, 미안하지만 아버지는 너를 버릴란다."
이 한마디가 아무래도 듣고 싶었다. 교이치는 양복 소매 끝에 눈을 묻고 울었다.
아버지의 손이 교이치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교이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리광을 부렸다.
아버지, 나 이렇게 어엿한 샐러리맨이 됐어. 아버지가 말한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제일 좋은 대학에 갔고, 아버지가 되고 싶던 샐러리맨도 됐어."
아버지는 찬찬히 교이치의 차림새를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참 대단하다. 정말 훌륭해."
"아무한테도 지지 않았어.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늘 일등 하고, 누구한테 건 지지 않게 열심히 살았어. 회사에 들어가서도 나 계속 일등이었다구."
"애썼구나, 교이치."
"응, 나 열심히 살았어. 아버지 아들이니까, 나, 머리가 그렇게 좋은 건 아니야."
"야, 그건 좀 심한 말 아니냐?"
"게다가 배짱도 없고 몸이 그렇게 튼튼한 편도 아니었어. 그래서 그만큼 더, 더 열심히 살았어. 그렇잖아, 나는 버려진 애니까 아무한테도 질 수가 없어. 만약 뒤떨어지면 버려진 애라서 그렇다고,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애라서 그렇다고 다들 손가락질할 거 아냐? 그건, 아버지 어머니한테 죄짓는 일이니까 절대 그럴 수는 없었어. 둘째도 안 돼, 둘째 앞에는 첫째가 있잖아. 그 애한테도 그런 소리 들을 거 아냐? 단 한 사람에게도 질 수가 없었다구."
교이치의 말을 들으며 아버지는 솟구치는 감정을 견디려는 듯 입을 꽉 다물고, 파나마모자의 차양을 올려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사실은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이 있었다. 훌륭한 샐러리맨이 되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되지는 못했다고 말하려다 교이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 한 귀퉁이의 멀쩡한 부분에서, 이건 아버지의 혼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아버지와 재회한 기쁨은 당장 슬픔으로 변했다.
"아버지."
"음."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대답 대신 아버지는 파나마 모자 차양으로 얼굴을 가렸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언제 어디서 어쩌다가 돌아가셨어요?"
죽은 자에게 그건 아마 가장 괴로운 질문이리라. 아버지는 괴로운 듯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큐슈에서 죽었다. 너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 술하고 약에 간장이 너덜너덜해져 버렸지."
"그래서 나를 데리러 오지 못한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의 가느다란 턱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병원에서 전화는 했다만. 죽기 전에 너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런 전화가 왔었다는 거, 난 몰랐어."
"아마 말 안 하셨을 게다. 거지가 되어 죽어가는 꼴을 너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되레 나를 꾸짖더라. 그렇지만 그때 내가 당숙한테 부탁한 건 그대로 지켜주신 모양이더라."
"부탁한 것?"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들며 지나갔다. 커다란 빗방울이 뚝뚝 소리를 내며 파나마모자에 떨어졌다. 아버지는 조용히 얼굴을 들었다.
"반드시 너를 데리러 갈 테니까 성은 바꾸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성이 바뀌는 건 너무 가엾으니까."
"그건 싫어. 난 아저씨네 아들이 되고 싶었어."
"내가 널 데리러 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 몸이니까. 그렇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너를 남의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부자간의 인연만은 끊지 않고 남겨뒀다가, 언젠가는 꼭 같이 살고 싶었어."
어머니가 죽은 후 둘이서 보냈던 쓸쓸한 날들이 가슴에 되살아 났다. 아버지는 꼬박 이태 동안 어머니 몫까지 교이치를 돌봐주었다.
"미안해요, 아버지. 나, 이제야 겨우 알겠어. 아버지는 너무 지쳤던 거야. 그렇지요? 회사는 문 닫을 처지인데 매일 밥 하랴 빨래하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됐던 거야. 미안해, 나는 그런 것도 몰랐어."
"그런 게 무슨 자식을 버릴 만한 이유가 되겠냐. 아버지는 기개가 모자란 사람이었다. 비겁한 인간이었어. 거기다 몸가지 함부로 굴리다가 너를 데리러 가지도 못했지. 그래서...... 네 당숙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뭘?"
거기서 처음으로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너도 알 것 아니냐?"
"...... 몰라. 뭘 부탁했는데?"
"성을 바꿔서는 안 되지만, 만약 내가 데리러 가지 못해도 교이치를 외톨이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네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잖냐? 우리 교이치가 웬만하거든 구미코와 결혼시켜서 계속 친척으로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네 당숙이 그렇게 해주셨지?"
교이치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가 아니면 예측할 수 없는 확실한 미래를 아버지는 교이치에게 놓아주고 가셨던 것이다.
- 츠노하츠에서 中
아사다 지로
1951년 도쿄 출생.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중학교에 진학하는 등 순탄한 성장기를 보내다가, 집안이 몰락하는 충격을 겪으면서 뒷골목 불량소년이 된다. 고교 졸업 후 이십 대를 야쿠자로 보내는데, 이때의 체험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글에서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문장을 읽고 소설가의 꿈을 품었다. 1991년, 야쿠자 시절의 체험이 담긴 파카레스크 소설 [당하고만 있을쏘냐]와 [번쩍번쩍 의리통신]을 펴내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에 장편소설 [지하철]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1997년에는 첫 소설집 [철도원]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은빛 비] [낯선 아내에게] [장미 도둑] [산다화], 장편소설 [번쩍번쩍 의리통신] [천국까지 100마일] [칼에 지다] 등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다양한 과거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 만남을 통해, 어떤 이들은 스쳐 지나간 나날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잊고 지냈던 사랑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허무하고도 쓸쓸한 사람살이의 행로를 은은하면서도 또렷하게 짚어내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쏟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참 맑고 깨끗한 슬픔과 만나는 일이다.
그림을 그리듯 눈앞에 펼쳐 보이는 정밀한 묘사와 탄탄한 서사구조도 돋보이지만, 눈물과 웃음,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휘몰아가는 작가의 솜씨는 가히 천의무봉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 한동안 다른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외할머니와 함께 하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후회가 밀려왔고 놀다 가라던 할머니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고, 내 이름을 부르며 반겨주던 목소리도 귓가에 맴돌았다. 외할머니와 찍었던 사진들을 한 폴더에 모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함께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 잠시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책을 집어 들었다.
고향집에 내려와 중고서점에서 아사다 지로의 책을 찾아보았다.나의 마지막 엄마에 이어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다행히 철도원이 두 권이 있었다. 오래된 책 같았지만 한 권을 구매하였다. 어떤 내용에 책인지는 겉만 봐서는 알 수 없었고, 나의 마지막 엄마와 같은 결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처음 나오는 이야기가 철도원이었는데, 철도원을 읽고 다음 이야기인 러브레터를 읽고 이 책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의 장례식 후 바로 읽은 책이라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지만 결코 무섭지는 않았다. 차가우면서 따뜻하고 슬프면서도 기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오히려 혼령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이 소설처럼 다가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눈물이 나고 외할머니가 내 앞에 나타나주기를 바랄 것이다. 다시 만난 할머니께 해드리지 못했던 걸 마음껏 해드리고 가슴에 담아둔 말들도 주고받고 싶어졌다. 이런 나의 바람은 다른 가족들도 똑같이 염원하는 것이겠지.
아사다 지로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사람냄새가 나는 인물설정으로 한층 더 소설 몰입감을 높여준다. 완벽하진 않지만 각자의 슬픔을 간직한 채로 먹먹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인생을 들여다보면 위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해야 하는 지도 일깨워주는 꽤 감동적인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마지막 엄마가 더 좋았지만, 철도원 속 몇몇 에피소드들도 마음을 후벼 파기에는 아주 충분했다.
늘 할머니가 나를 바라봐주던 따뜻한 눈빛을 기억하고 할머니처럼 올바르게 살아가야지라며 마음속으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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